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리스마스 정전 (문단 편집) == [[1914년]]의 [[성탄절]] ==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JBtGltSuwgE, height=240)]}}}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WUlPNWDvk-c, height=240)]}}} ||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9Pey-HmXGfs, height=240)]}}}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cSrqRdlFeo, height=240)]}}} || [[제1차 세계 대전]]은 발발 당시만 하더라도 국가를 막론하고 전쟁이 길어야 2~3달이면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국가 지도부와 군 지휘부는 물론이고 전방의 말단 [[사병]]들까지도 이에 동의하였고,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국민들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전혀 예기치 못한 형태의 전투현상이 발생한다. 구시대적인 관점의 낙관론과는 다르게 고도로 발달된 기술력이 집약된 전장의 새로운 환경은 기존의 관념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다. 강력하고 파괴적인 각종 신무기들에 가로 막혀 진격은 끊임없이 좌절되고, 필연적으로 전선은 고착되어 무의미한 희생만 늘어갔다. 그렇게 [[참호전]]이라는 새롭고도 끔찍한 양상의 전장 속에 갇혀야만 했던 대부분의 일선 [[병사]]와 [[부사관]]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직속 상관이자 참호 속에서 병사들과 함께 비슷한 생활을 하였던 [[장교]]들조차 갈수록 지쳐갈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치열했던 [[1914년]]에도 겨울은 찾아왔고, 어느덧 [[성탄절]]이 되었다. 양측의 장병들은 불과 몇십~몇백미터의 무인지대를 사이에 두고서 서로 대치 중인 와중에서도 참호 속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며, 조촐하게 행사를 가지고 있었다. 여러 종파로 갈리긴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교를 믿는 알바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코소보를 제외한 모든 유럽 대륙은 [[기독교]]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다. 때문에 [[성탄절]]은 국가를 불문하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기념일이었다. 그래서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심각한 상황이 아닌 이상, 부대 내에서 자그마한 행사라도 가지는 것이 관례였다. 더군다나 전쟁 당사자였던 [[영프독]] 3국은 가톨릭-개신교의 차이야 있었다지만 같은 라틴-게르만 베이스의 서방 기독교(Western Christianity)[* 실제로 이런 위키 표제어가 있는데, [[가톨릭|로마 가톨릭]]과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를 묶어 그리스-슬라브 문화권의 [[정교회]], 그리고 여타 非 [[니케아 공의회|니케아]]-[[칼케돈 공의회|칼케돈]] 교파들과 대비되는 의미로 서술되었다.]를 믿고 있었고 민족, 혈통, 문화적으로도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웃나라들이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해프닝이었다. 역으로 동부전선의 독일-러시아 사이에서 이런 일화가 없었던 이유는 종교, 민족, 혈통, 문화적 차이점이 서부전선의 영프독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탄절도 [[러시아 정교회]]를 믿던 당시 제정 러시아에서는 날짜부터 [[율리우스력|그레고리력 기준으로 1월 6일-7일로]] 다르다. 그런 가운데 캐럴 소리는 아군의 참호를 넘어 상대측의 참호에까지 전달되었고, 참호 속의 장병들은 비록 서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상대방도 자신들처럼 캐럴을 부르며 성탄절을 기념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소속은 달랐지만 성탄절의 정신만은 공유하고 있었다.[* 거기에 영어와 독일어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언어인 만큼 상당부분 유사한 점이 많다. 거기에 노래까지 똑같으니 그 시너지가 장병들에게 미친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문서 아래쪽에 있는 광고영상에서도 영국군과 독일군이 각각 영어와 독일어로 인사를 하는데 서로 못 알아듣는다는 분위기가 전혀 없다. 심지어 들어보면 발음마저 매우 유사하다.] 그러자 독일 측에서 참호 위로 촛불이나 전등으로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들을 올려놓기 시작했고, 어떤 독일 병사가 용기를 내어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들고 참호 밖으로 올라왔다.'''[* 독일군 장교가 [[백기]]를 들고 캐럴과 스코틀랜드 민요 [[Annie Laurie|애니 로리]]를 부르며 올라왔다는 증언도 있다.] 평소라면 이렇게 아무런 엄폐물도 없이 당당하게 나타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고[* 실제로 전쟁이 심화되면서 지옥도와도 같은 [[참호전]]의 끔찍한 환경을 견디다 못한 일부 병사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현세의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자살이나 자해를 기도하기도 했다.], 적군의 돌발 행위에 놀란 영국군 측도 당연히 전투 태세를 취했지만... '''그런 그를 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것을 발단으로, 양측의 수많은 장병들이 비무장 상태로 참호 밖으로 올라왔다. 이윽고 대치선의 한가운데서 서로를 마주본 그들은 서로 악수하고 포옹하며 담소를 나누었고, 크리스마스 선물로 서로 간의 부대 휘장이나 [[계급장]], [[군모]] 등의 소소한 기념품(?)이나 식량, 술, 담배 등 간단한 기호품을 교환하며 우정을 나눴다. 병사들의 이러한 매우 파격적인 일탈행위를 코앞에서 지켜보던 부사관, 장교들도 대부분 분위기에 동참하여 상대측 지휘관과 만나 신사적으로 조약을 맺고, 당분간 교전을 하지 않기로 합의한다. 이때 양 진영 참호사이의 무인지대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어 대치 중 수습이 어려웠던 [[시체]]들도 제대로 수습할 수 있었다. 어느 부대는 그 시체들을 치운 빈 땅에 축구장을 급조하여 팀을 나눠서 같이 [[축구]]를 즐겼다. 경기 결과는 3-2로 영국이 독일에게 역전패했는데, 영국 측은 이를 명백한 [[오프사이드]]였다고 하지만, 독일 측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주장이라고 했다는 양자의 기록이 있다. --전쟁보다 중요한 스포츠맨 정신-- 많은 미디어에서 이 사건을 언급할 때, 양측 병사들이 축구를 하는 것을 그려냈기 때문에 축구는 이 사건의 가장 큰 이미지가 됐다. 다만, 이들이 진짜 축구를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https://newrepublic.com/article/126570/myth-christmas-truce-soccer-match|#]] 이 사건을 연구한 역사학자 사이먼 존스는 영국과 독일의 자료에서 같은 게임의 명확한 증거를 찾는 것은 어렵다고 밝혔다.[[https://simonjoneshistorian.com/2015/01/06/understanding-the-1914-christmas-truce/|#]] 이 일시적이며 자연적으로 발생한 정전 상태는 특히 영국군과 독일군이 주로 대치했던 [[벨기에]]의 이프르 전역에서 많이 나타났다. 이외의 다른 [[서부전선]] 전역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크리스마스 정전이 발생했다고는 하나, 영국군과 독일군의 이러한 정전 행태를 지켜보던 벨기에군과 프랑스군 병사들은 동참은커녕 오히려 분개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당시 벨기에는 전 국토가 침략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벨기에의 강간]]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전쟁 중 독일에게 가혹한 피해를 입은 상태였고, 프랑스도 전선의 대부분이 프랑스 영토 내에 형성되어 국토가 유린당하는 와중이니 적국 독일인들에 대한 감정의 골이 깊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렇다고 없던 건 아니다. 프랑스군 사병들 사료에도 독일군과 성탄절 교류로 담배나 신문을 교환하곤 했다고 나온다. 벨기에 지역도 비슷했는데, 벨기에군이 독일군들에게 자신의 가족들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며 참호를 오간 기록도 있다. 독일측 사병들 중에서도 이를 군인정신이 어디갔냐며 불쾌히 여긴 기록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 일화를 두고 독일의 치욕이니 위대한 프로이센 군인정신은 어디갔느니 하면서 불평한 일기를 남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